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칠리아 왕국 (문단 편집) ===== [[페드로 3세]], [[쿠스탄차 2세]]와 [[카를루 1세]]의 대결 ===== [[파일:war_of_the_vespers_by_hillfighter-d39vccq.png]] 카를루 1세는 시칠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진압하고자 메시나로 진군해 포위 공격했다. 그러다가 페드로 3세가 시칠리아에 들어와서 왕으로 선포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나폴리로 철수했다. 이후 교황청에 "이단인 [[정교회]]를 토벌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가톨릭으로 되돌리려는 십자군을 저지한 아라곤 왕을 정죄해달라"고 요청했고, 마르티노 4세는 이를 받아들여 페드로 3세를 [[파문]]하고 아라곤 [[십자군]]을 선포했다. 카를루 1세의 조카이자 프랑스 국왕인 [[필리프 3세]]가 이에 호응해 아라곤 왕국에 선전포고했다. 페드로 3세는 임박한 전쟁에 대비해 길렘 갈세란 데 카르텔라(Guillem Galceran de Cartellà)를 알모가바르 보병, 석궁병, 창병으로 구성된 육군 사령관으로 선임하고, 해군 사령관으로 라우리아의 루지에로를 선임했다. 두 장군은 육상과 해상에서 동시에 공세를 개시해 1283년 2월 칼라브리아 해안 지대의 대다수 도시를 장악했다. 이후 페드로 3세는 프랑스군이 아라곤 왕국을 침략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아라곤 본토로 떠났고, 아내 쿠스탄차가 여왕 '''[[쿠스탄차 2세]]'''로서 시칠리아를 지켰다. 쿠스탄차는 적극적인 대외 활동을 전개했다. 아풀리아, 캄파니아, 칼라브리아 등 시칠리아 왕국의 지배를 받던 남부 이탈리아 도시들을 최대한 포섭하려 노력했다. 칼라브리아의 몇몇 도시들이 카를루 1세의 폭정으로부터 구원해달라고 청하자 지체없이 군대를 파견해 이들의 독립을 도왔다. 또한 유능한 제독인 라우리아(Lauria)의 루지에로를 시칠리아 함대 총사령관으로 삼아 적 함대가 시칠리아에 접근하는 것을 막게 했다. 루지에로 제독은 나폴리 만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카를루 1세와 필리프 3세 휘하 프랑스 함대를 격멸하고 카를루 1세의 아들 카를로(훗날 [[카를로 2세(나폴리)|카를로 2세]])를 생포했다. 호엔슈타우펜 추종자들은 콘라딘을 처형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카를로를 처형하자고 주장했지만, 쿠스탄차는 거부했다. 그 대신, 그녀는 카를루 1세에게 "아들을 돌려받고 싶으면 나의 이복 누이인 베아트리체를 보내라"고 요구했고, 카를루 1세는 받아들였다. 쿠스탄차가 베아트리체 외의 다른 형제들을 돌려보내라고 요구하지 않은 까닭은 기록이 미비해 불확실하지만, 그들이 돌아오면 남편의 시칠리아 왕위를 위협할 수도 있다고 여겼기에 돌려보내라고 요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이후 베아트리체가 돌려보내졌지만, 카를로 왕자는 1285년 카를루 1세가 사망한 뒤 몸값이 지불되지 않았기에 옥고를 계속 치러야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